약자의 필승법
솔직히 말해, 이 인간, 아니, 이 사람이 자신의 '보호자'를 자청했을 때에는 조금 고마웠다.
그때는 눈앞이 캄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던 때였다. 상대를 가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아버지도, 누님도 모두, 이대로는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그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목이 떨어질 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꺼이 앞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동료로 인정하고, 이 세계에서 살아갈 방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겠다고 말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에게 동앗줄을 내려주는 사람에게 의심의 시선부터 보낼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환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을 품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가까스로 그런 평범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윤환 도령은 말이지."
그리고, 지금.
지금 환의 한쪽 팔을 나무에 단단히 고정시켜 두고는, '다른 쪽 손을 쓰지 않고 빠져나가라'라는 임무(?)를 부여한 그 사람은, 환의 그런 기대를 철저하게도 부수었다.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면서 매번 장난질이었다. 기대는 단 한 조각도 남길 수 없다는 듯이, 어디서 찾아오나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면서.
"약해빠진 놈이 강자를 쓰러트릴 방법이 뭔지 알아?"
지금도 그랬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몸을 빼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환을 이 꼴로 만들었다. 항상 양손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몸을 자유로이 쓰지 못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다─그런 말에 넘어가고 말았다. 꽤 그럴듯한 가정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상황을 변하게 할 무언가는 아니었다. 그 남자, '흑나비'는 꽉 묶여 몸을 비트는 것밖에 하지 못하게 된 환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환이 묶인 나무 위에서 태평하게 다리나 흔들며 홀로 휴양을 즐겼다.
"가르쳐 주실 생각으로 물으시는 겁니까?"
이쯤 되니 '흑나비'가 부여한 조건을 무시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편이 나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어쩐지 '흑나비'가 더 악랄한 일을 떠올릴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이 엄습했다. 환은 '흑나비'가 던지는 말에 적당히 대꾸하면서, 나무에 묶인 팔을 빼낼 방법을 고심했다. 일단 손목의 고정이 풀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기에, 진지하게 제 손목을 비틀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답을 고민할 여유는 있구나?"
아프기야 하겠지만 어깨를 꺾어 팔을 한껏 비틀면 빠져나갈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제 보신보다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을 우선하고 싶었다. '흑나비'가 가르치려 하는 것이 혹 이런 마음가짐일까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금세 고개를 흔들어 그 좁쌀만한 기대를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지금까지 '흑나비'가 환에게 시킨 일은 대부분이, 아니, 거의 전부가 환을 골탕 먹이기 위한 행위였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는, 환이 그 말에 속아 진지해지면 웃음을 참지도 않고 쏟아내기 일쑤였다. 그런 경험이 제법 쌓였는데도 이번에야말로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 순간도 물론 그랬다. 자연히 '흑나비'의 질문에 답하는 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뭐든 좋으니 말해 봐."
때문에 그 말투를 조금 늦게 인지했다. 평소 환이 들어오던, 웃음을 꾹 누르는 그 음성이 아니었다. 팔을 꺾을 각도를 고민하던 환은 고개를 들었다. 제 머리 위에 자리한 '흑나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밑으로 늘어뜨려진 다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잠시 '흑나비'를 응시했다. 질문을 던지던 그 목소리는 확실히 환이 들어오던 것과 조금 달랐다. 가장 명확한 차이를 짚으라고 하면, 지금 '흑나비'의 음성은 밖을 향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 뭔가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환을 이렇게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을 깜빡 잊기라도 한 듯이.
"……."
환은 잠시 모든 사고를 멈추었다. '흑나비'의 얼굴은 나뭇잎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만약 저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면 이번에도 무시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판단할 재료가 없었기에, 환은, 의구심을 가득 품은 상태로 목소리를 높였다.
"방심시키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흑나비'는, 누가 뭐래도 이 세계에서는 '강자'로 통하는 인물이다. 이 사람이 '패배'하는 그림이 도무지 떠올려지지 않을 정도로. 혹 방금 던진 그 질문은 '흑나비' 자신이 누군가에게 쓰러질 경우를 상정하기 위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환은 살짝 긴장한 채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걸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안 될걸."
생각보다 멀쩡한 대꾸가 돌아왔다. 환은, 모처럼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살짝 긴장했다.
"그러면 저어, 인질을 잡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약점이 되지도 않을 텐데."
"그럼 기습을 하면."
"지금껏 말한 것 중에 제일 가망이 없어."
'흑나비'는 환이 던지는 말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환이 하는 말을 머릿속에 넣고 제대로 사고를 하여 답을 내놓고 있었다. 환은, 저 사람이 정말로 뭔가 고민하는 모양이라 여기게 되었다. 환을 골려먹는 중에 저리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기에, 꽤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탁.
자신이 무엇을 하던 도중이었는지도 잊은 환의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무 위에 자리하고 있던 자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내려왔다. 환은,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눈에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이렇게 가까이 관찰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흑나비'를 만나면 매번 바닥을 구르거나 나무에 매달리거나, 하여튼 제대로 땅을 딛고 서 있기 힘들었으니까. 자연히 '흑나비'와 이리 마주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흑나비'의 시선은 생각보다 그리 차갑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환은, 그 눈에 어린 것이 장난기임을 조금 늦게 인지했다.
"뭣."
아차 싶은 순간, '흑나비'는 환의 자유로운 쪽 손을 붙들었다. 그나마 쓸 수 있던 손이 '흑나비'의 손에 붙들려, 그나마 저항할 수 있던 기회를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지금까지 말한 건 전부 강한 놈들 역시 쓸 수 있는 방법이잖아."
'흑나비'는 말했다. 인질을 잡는 방법도, 방심하게 한 후 기습하는 방법도 모두,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쓰러트리는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고. 그랬다.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나열한 것뿐이기도 하고, 강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정정당당하게 실력만으로 상대를 제압한다고는 할 수 없으니. 환이 몸담고 있는 세계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상황이 어찌 됐든, 죽은 쪽이 약자 취급을 받는 세계니까.
"알려줄까?"
환의 손을 붙든 채인 '흑나비'의 목소리는 무척 작았다. 하지만 환에게는 충분히 선명하게 들렸다. 귓가에 속삭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잘못 들을 수도 없었다.
"제, 가 그 방법을 쓰면, 어쩌려고……."
"윤환 도령은 자기가 약해빠졌단 자각은 있나 보네?"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야 당신이 상대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대꾸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겨우 들어갔다.
누가 강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판가름하는 방법은 여럿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역시 직접 맞붙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제 실력을 알아보겠다고 잘못 나섰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죽지 않았다 해도 상처가 가볍지는 않을 터였고, 패배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꼬리표가 될 터. 때문에 제 실력을 가늠해 보겠다며 싸움을 거는 짓은 웬만해서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간 맡아온 임무가, 그 임무의 난도와 성공률이 기준이 되었다. 보통은 그랬다. 그리고.
이 남자의 경우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신을 앞에 두고, 감히 누가 자신이 강하다고, 하겠습니까."
'흑나비'는 평소 제 기척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돈했다. 그 탓에 나타나면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탓도 있고, 그가 나타난 순간 강렬한 감각에 압도되기 때문이었다. 초짜라도 피부로 알 수 있는 존재감이 '흑나비'를 강자로 인정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 자신은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기에 더더욱 인식은 견고해졌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환은, '흑나비'가 자신을 받아주겠다고 했을 때 조금은 마음이 놓였, 다.
"그렇다면 더 필요한 거 아냐?"
싱긋 웃는 '흑나비'의 얼굴에 담뿍 담긴 장난기가 금세 안도를 밀어내 버렸지만.
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흑나비'를 관찰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 화제를 꺼냈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나 고민해야 했다. 저의를 읽기는 어려웠기에, 일단은 '흑나비'와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환이 긴장한 시선 그대로 자신을 응시하자, '흑나비'는 씨익 웃었다.
"아주 간단해."
"간, 단하다, 고요?"
"그래."
'흑나비'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환은, 한층 강렬하게 느껴지는 '흑나비'의 기척에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상대의 마음을, 손에 쥐면 돼."
말 자체는 빠트리지 않고 들었다. 하지만 말 전체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환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을 읽은 '흑나비'는 큭, 억누르지 못한 웃음 한 조각을 흘렸다.
"연모하게 만들면 된다고."
"무, 어……."
속삭임과 동시에, '흑나비'는 손을 움직였다. 단순히 잡고 있던 손이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졸지에 깍지를 낀 꼴이 되었다. 환의 손에 파고든 손가락은 힘주어 자리를 지켜, 상대가 쉽게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었다.
"그러면 그 어떤 단단한 벽도 단숨에 허물 수 있어."
'흑나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짝 잡아당겼을 뿐인데도, 환의 몸이 기우뚱 움직였다. 나무에 묶인 다른 쪽의 팔 덕에 '흑나비'에게 완전히 기우는 것만은 면했지만, '흑나비'가 의도한 행동은 충분히 전해졌다. 환의 눈이 커지는 모양새도 '흑나비'에게는 훌륭한 반응이었다.
"어때? 쉽지?"
'흑나비'의 어깨가 환의 어깨에 닿았다. 그 단단한 팔이, 몸을 빼내고 싶다는 환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어디 한번 방금 가르쳐 준 방법을 써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환은 잔뜩 찡그린 눈으로 '흑나비'를 노려보았다. 변함없이 실실 웃고 있는 그 얼굴을.
후우.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려 숨을 골랐다. 그 작은 행동까지 모두 '흑나비'에게 전해지고 있겠지만 그것까지 제어할 여유는 없었다.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왜? 나 같은 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어?"
환의 반응이 예상 범위 내였는지, '흑나비'는 킥킥 웃었다. 환이 온몸으로 내뿜는 불쾌함을 즐기며 손에 힘을 한층 불어넣었다. 단순히 힘을 한층 강하게 넣는 데 그치지 않았다. '흑나비'는 환의 몸을 쓰러트릴 것처럼 잡아당겼다. 나무에 여전히 묶인 채인 환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무릎이 꺾여 버렸다.
"윽."
"그런 놈을 꺾으려면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
무릎이 꺾인 탓에 몸도 무너졌다. 그야말로 나무에 매달린 꼴이 된 셈이었다. 환은 순간 온몸에 퍼진 통증을 숨 죽여 견뎌냈다. 차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보일 풍경이 빤했다. 보아봤자 한층 불쾌해질 뿐임을 알았기에, 그보다는 이 상황을 만든 '흑나비'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떠올리려 했다.
다만.
"……."
움직임을 최소화한 환의 태도를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흑나비'는 자연스럽게 환의 손과 엮이지 않은 쪽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제 허리 높이에 놓인 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무, 무, 무……!"
"귀여워해 달라고 높이 맞춘 거 아니었어?"
진절머리를 내는 환을 두고 '흑나비'는 큭큭, 잘도 웃었다. 그러면서도 환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이런 훌륭한 장난감을 손에 넣었는데 풀어줄 리 있느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몸을 아무리 비틀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흑나비'는 손의 힘을 풀어주지 않았다. 환이 무슨 발버둥을 치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였다. 한참 몸을 비틀다 보니 양쪽 어깨가 뻐근해졌다. 환은, 결국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하도 비틀어댔더니 나무에 묶인 쪽의 손은 피가 통하지 않은 탓인지 감각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환은 제 머리를 여전히 쓰다듬고 있는 '흑나비'를 슬쩍 곁눈질했다. 아직도 흥미가 떨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웃는 얼굴 그대로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라고 해야 할까. 섣불리 판단하지 않은 상태로, 환은 입을 열었다.
"당, 신은."
"응?"
"제가 당신을, 쓰러트려 주길 원하십니까?"
질문했다. '흑나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정답을 맞추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흑나비'의 표정에 변화가 없는 탓이었다.
"날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 있긴 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울렸다. 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쥐어짜내어, 나무에 묶인 쪽의 팔을 크게 꺾었다.
"크, 윽!"
팔꿈치가 반대쪽으로 꺾일 듯한 기세로 비틀렸다. 거듭 시도해 온 시도가 쌓인 덕에, 겨우 나무에 고정되어 있던 팔이 빠졌다. 참고 있던 숨이 일시에 터졌다. 그러나 팔을 빼면서 찾아온 고통을 갈무리할 틈은 없었다. 환은 재빨리 몸을 틀어 '흑나비'의 손에서 머리를 빼냈다.
"……."
'흑나비'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매서운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환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다, 이내 풋 웃었다.
"달리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그 각오는 참 좋단 말이지."
"당신 손아귀에 언제고 머물 생각, 없습니다."
"그래, 그래. 기개 하나는 당차네. 그래야 어린애지."
큭큭 웃으면서, '흑나비'는 겨우 환의 손을 놓아 주었다. 비로소 자유가 된 환은, 그럼에도 아직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두 손을 겨우 맞잡아 천천히 주물렀다.
나약한 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를 쓰러트릴 방법.
그는 꽤 오래 그 방법을 연구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롯이 약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그 자신이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결론은 내려졌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어떻게든 제 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지워야 한다, 고.
"어린애가 할 만한 발상이지."
어린애였으니까 뭐.
'흑나비'는 그리 생각하면서, 환을 꽉 붙들고 있던 제 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는 손이었다.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손이지만.
'흑나비'의 시선이 손에서 떠났다. 환을 묶어두고 있던 나무는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고하게. 그 나무를 응시하던 '흑나비'는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